1부: 끝과 시작
“당신처럼 영어 잘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게 요즘 세상이죠.”
전화기 너머의 30대 중반가량으로 짐작되는 목소리는 상냥했지만, 더없이 단호했다. 지원서만 열한 번째 반송이었다.
지환은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책상 위에 덩그라니 놓인 그의 이력서는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한때 학생들에게
웃으며 자신있게 영어 문법을 가르쳤던 손으로, 그는 이제 서툴게 하지만 필사적으로 자기소개서를 타이핑하고 있다.
30년이었다.
한 동네에서 줄기차게 영어 학원을 운영하며, 아이들의 꿈을 키우던 시간이. 하지만 길고 길었던 코로나 팬데믹불으로 초래된 불경기는 누구도 비껴가지 않았다. 외국유학파 출신 실력파 원장이 운영하는 대형 학원이 들어오면서 점점 학생들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고, 어느새 매월 적자가 쌓여갔다. 미련하게 버틸대로 버티다가, 결국 지난달 마지막 수업을 끝으로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학원의 문을 닫았다. 그날 밤, 지환은 가슴이 먹먹해졌지만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의 나이 57세.
“다른 분야로 가야될 것 같아. 영어는 이제 그만. 이 일도 이젠 힘들고 지쳤어.”
스스로에게 수없이 다짐했지만, 이력서를 쓰며 머릿속엔 영어 수업이 떠올랐다. '강의력' 외에 내세울 게 없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날은 유난히 매섭게 찬 바람이 불었다. 11월 중순이었으니 그럴만도 하지만.
정우는 길을 걸으며 내내 중얼거렸다.
“뭐라도 해야지.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집 안은 적막했다. 아내는 교대 근무로 집에 없었고, 아들은 결혼해 멀리에서 떨어져 살았다.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은 침묵 속에서 정우는 귀퉁이가 여기저기 벗겨진 마룻바닥을 바라보았다. 이 집도 그의 삶도
어딘가 헐렁해 보였다.
그는 책상 위의 우편물을 집어 들었다.
“이건 뭐지?”
‘소규모 창업 지원 세미나’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창업이라….” 그는 피식 웃었다. 학원을 닫은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또 창업이라니. 그럼에도 그는 우편물을 구겨 쓰레기통에 넣지 않고 이력서를 쓰던 노트북 아래에 끼워 두었다. 어떤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이었다.
다음 날, 세미나가 열린 지역 커뮤니티센터는 생각보다 썰렁했다. 몇몇 자신과 같이 배가 불룩이 나온 중년 남성들이 서로 어색하게 눈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지환도 그들 사이에 앉았다. 강연이 시작되자, 30대 후반의 짧은 커트 머리를 한 보이쉬한 여성강사는 열정적으로 성공 사례를 이야기했지만, 지환은 내내 시계를 쳐다봤다. ‘이것도 나랑은 안 맞는구나.’
강연이 끝나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지환은 그냥 나가려고 했지만, 문득 한 구석에 앉아 있던 눈매가 서글서글한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이가 40대 후반쯤으로 보였다. 남자는 먼저 말을 걸었다. 신뢰가 가는 목소리다.
“고민 많아 보이십니다. 영어 관련 일을 하셨나요?”
지환은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영어를 쓰지 않는 새로운 도전을 생각해 보신 적은요?”
그 순간, 지환의 눈이 살짝 빛났다. 자신이 목마르게 기다리던 질문을 듣는 기분이었다.
“글쎄요,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남자는 미소 지으며 은빛 명함을 건넸다. 3년전 여름 어느날 바다 낚시에서 잡은 눈부세게 파닥대며 은빛을 뿌려대던 은갈치가 오버랩되었다.
“제가 도울 수도 있을 겁니다. 커피 한 잔 하시죠.”
명함에는 ‘커리어 코칭 전문가’라는 직함이 적혀 있었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