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세계
1부: 새벽의 초대
어둠이 깊어질수록 소라는 불면의 나락으로 더 깊이 빠져들곤 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상처받은 기억들이 밤마다 피어올랐고, 낮에 애써 감추었던 공허감이 밤의 정적 속에서 더 선명해졌다. 하지만 오늘 밤은 달랐다.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달빛이 마치 무언가를 암시하듯 그녀의 책상 위를 비추고 있었다.
소라는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책상 위에 놓인 오래된 스케치북이 그녀의 시선을 붙들었다.
연필로 그려진 옛날 그림들이 빛바랜 페이지 사이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마지막으로 그 스케치북을 펼친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소라는 조심스레 스케치북을 열었다.
첫 장에는 "나의 꿈"이라는 글자가 삐뚤빼뚤한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그 아래에는 소녀 시절의 소라가 그린 그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꽃이 만개한 정원,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 그리고 활짝 웃고 있는 어린 소라의 모습까지. 그녀는 그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땐 정말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는데….’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서른을 넘기고 마흔을 지나, 소라는 자신이 원하는 삶과는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오랜 시간 동안 그녀는 가족을 위해, 직장을 위해, 그리고 세상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해왔다.
그녀의 꿈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소라의 핸드폰이 진동하며 화면을 밝혔다. 늦은 밤, 뜻밖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소라 씨.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강민혁입니다. 지난번 브랜딩 프로젝트에서 뵈었죠.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새로운 예술 프로젝트를 기획 중인데, 소라 씨의 감각이 꼭 필요할 것 같아요.
가능하다면 직접 만나 뵙고 자세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강민혁. 익숙한 이름이었다. 지환과 함께했던 브랜딩 프로젝트에서 만났던 에코페어의 대표.
그의 열정적인 태도와 따뜻한 미소가 떠올랐다. 소라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답장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강 대표님. 메시지 감사합니다. 언제 만나는 게 좋을까요?”
며칠 후, 소라는 강민혁과 작은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예의 그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반겼다.
소라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단순한 비즈니스가 아닙니다. 예술과 사람을 연결하는 다리 같은 역할을 하고 싶어요.
특히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소라는 그의 말에 자연스럽게 끌렸다. 그녀의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꿈이 다시 깨어나는 듯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감도 스며들었다. 오랜 시간 동안 예술과 거리를 두었던 자신이 과연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저 같은 사람이 과연 도움이 될까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어요.” 소라는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강민혁은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라 씨, 당신이 가진 건 기술만이 아닙니다.
당신의 이야기는 분명 누군가에게 큰 힘이 될 겁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 지금의 당신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그의 말은 마치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소라는 깊은 숨을 내쉬며 강민혁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소라는 스케치북을 다시 펼쳤다. 이번에는 빈 페이지를 찾았다. 그리고 연필을 들어 조심스럽게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은 서툴렀지만, 마음속에서는 잊고 지냈던 열정이 되살아났다.
달빛이 다시 그녀의 책상을 비췄다. 스케치북 위에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날아가는 나비가 그려지고 있었다.
소라는 속삭였다. “이번엔 놓치지 않을 거야.”